카테고리 없음 2014. 8. 18. 19:38




1. 살아생전에 김순흥에 친일 행각에 대한 처단이 있었어야 했겠으나 이미 그는 죽었고, 안타까울 뿐이죠. 

2. 그가 친일 행각으로 인하여 취득한 부당한 이득이 그 상태로 존재하여 어떠한 금전적 형태로 상속되어 왔다면 그것은 국가로 환수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이 뿐 아니라 모든 친일파들에게 해당된다고 생각합니다. 
단, 그렇게 멀쩡하게 남아있을 가능성 따위는 전혀 없겠죠. 

3. 그가 적극적 친일을 했던 소위 문자 그대로의 친일파라면 그는 비판받아야 합니다. 만약 이지아 씨가 자신의 조부의 행동에 대해 옹호하거나 두둔한다면 그 또한 비판의 대상입니다. 하지만 김순흥의 손녀라는 이유로 이지아 씨가 비난받을 이유는 없습니다.






행적만 보면 친일파네요 더할것도 감할것도 딱히 없어보이구요. 
1) 최초 헌금이 33년으로 일제 점령후 상당한 후기. 요컨데 상당기간 헌금을 내지 않았음. 에 대해서는 1910년생이 우리나이로 24살에 첫 헌금이면 상당기간 내지 않았다고 보기 힘든거 같네요. 다른친일파들은 성인도 되기 전부터 일제에 헌금을 냈던건가요. 
개인적인 판단은 친일행위로 돈벌었지만 일제에도 그렇게 많은돈은 바치고 싶지 않았던 사람 처럼 보이는군요 
이지아씨를 연좌제로 비판하는건 말도안된다고 생각하고 그런 비판은 이지아씨가 조부의 행적을 찬양한다면 있을만 하지 않나 싶군요.






http://star.mt.co.kr/view/stview.php?no=2011121910165877717&type=1&outlink=1 
<이지아, 알고보니 명망가 자손..뒤늦게 알려져> 
소속사 키이스트의 한 관계자는 "이지아의 조부가 고 김순흥씨가 맞다"며 "고조부 증조부부터 잘 알려진 [명망가]였다"고 전했다. 



사실 김순흥의 친일행각이 적극적인 편이 아니었다는 건 비교적 팩트에 가깝고, 넷상에서 까인 것보다 별 내용이 없음또한 팩트에 가깝습니다. 이건 제가 실드치고 말고할 부분이 아닙니다. 
제가 판단을 각자 해보라는 건, 소극적 친일의 도덕적 비판의 폭은 어느정도여야하는가, 또는 보기에 따라 김순흥은 일제치하에서 삥을 뜯긴 것에 가깝지 않나(물론 재산 유지를 그 대가로 받았기에 역시 비판에서 자유롭기 힘들것이나) 정도의 관점입니다.







일제시대때 경성제일 조선인 갑부가 헌금을 안내고 멀쩡히 잘 지낼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제가 조폭에게 보호비 내는 것도, "조폭에게 안 얻어맞고 장사 편하게 할 수 있으니 지 좋자고 한 일이다"고 평가하실 수 있느냐고 여쭙는 겁니다. 
저는 이유여하를 불문하고 김순흥이 한 친일행위는 비판받아야 한다고 봅니다. 허나 모든 친일행위가 다 자발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어떤 일말의 변명의 여지도 없다는 태도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현실적이지도 않고, 별로 이 사회에 도움이 되는 가치관도 아닙니다.








이정도를 엄청난 친일파라고 보기는 힘들것 같네요. 
경성제일의 자산가가 저정도도 안하고 버틸 시대적상황도 아니였을거구요. 
저도 삥뜯긴정도로 보이는데... 판단이 어렵네요. 
정말 악질에 기회주의자라면 사회환원 이화학당기부 육영재단 이런거도 없었을것같구요.







약간 논의의 주제를 벗어나긴 하지만 조금 더 부연하자면 개인적으로 1세대 친일과 2세대의 친일은 좀 구분이 되야 하지 않나 해요. 
이완용같이 병탄이전에 이미 정립된 가치관을 지녔을 시기(+ 사회지도층이라는 포지션)를 지난 사람들이 했던 친일행위와 
병탄 이후 태어나보니 나라는 공식적으로 일본의 속국이고 모든 공교육은 이미 일제의 시스템이며 성인이 되어서도 역시 시대는 
식민지였던 사람들의 친일행위는 굉장히 다르다고 보거든요. 
지금 본문의 김순흥씨가 태어난 해가 1910년이니 딱 2세대의 예인데, 이미 빼앗겨버린 나라에서 태어나 장년이 될 때 까지 식민지를 
살아간 사람들이 주체적으로 민족주의적인 관점에서 독립운동에 뛰어들기엔 웬만한 여건이 아니고서야 정말 쉽지 않은 일이라고 봐요. 
그냥 태어난 이후 보고 겪은대로 시스템에 순응하는게 사실 훨씬 일반적이거든요. 조선시대 양반가에서 태어났다면 과거준비를 하고 
노비로 태어났다면 운명에 순응한 채 노비로 삶을 마감하는게 특이한 일이 아닌 것 처럼요. 
그래서 종종 당 세대를 겪지 못한 입장에서 친일행위를 정의하고 그에 대한 응보의지를 쉽게 표현하는게 좀 불편합니다. 
개개의 엄밀한 구분이 선행되지 않는다면 이건 지금의 기준으로 고려시대의 보건상태나 인권수준을 두고 미개하다 하는 수준의 
논의처럼 느껴져서요.




잘못된 게 많이 퍼지네요. 
이지아가 명망가 말을 한게 아니라, 옆동네 살았다는 정대철 상임고문이 기자와 한 이야기가 퍼진겁니다. 소속사는 사생활이라며 오히려 곤란해 했죠.





사생활이라 곤란하다. 근데 사실 조부가 명망있는분이고 집안이 명문가가 맞다고 홍보하는 뉘앙스의 기사가 더 있었습니다. 친일파 사건이 터지자 다 삭제했구요. 예전에 로마에서 이지아를 만났네 하고 자작 언플이 들컸던 전적이 있어서 당시에 저 기획사 또 정신나갔냐고 비아냥을 들었는데 정말 기억하시는 분 안 계신가요? 저만 바보되는 느낌입니다ㅜ ㅜ








저는 일단 이지아씨와 그 조부와 연결지어 이지아씨를 비판하는 건 무리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지아씨 본인이 홍보에 조부를 언급했기 때문에 오히려 그런 비판기사가 처음에 등장한게 아닌가, 라고 생각합니다. 그와는 별개로 김순흥이란 인물이 말씀하신대로 무슨 이완용급은 아니란 것도 당연히 맞겠지요. 가령 드러나지 않은 친일행적이 있었음을 가정해본다고 하더라도 그 정도급의 매국노와 비교불가임엔 틀림없습니다. 

다만 제가 올해 봄에 한국근대사 관련해서 배운게 생각나서 끄적여봅니다. 일제시기에 일본은 대대적으로 한국에 토지조사사업을 벌이고 산미증식계획을 수립하여 실천하지요. 토지조사사업의 골자는 한국의 전통적인 토지측량과 중층적 소유를 싸그리 무시하고 일본식 계량법(평, 정보)를 확립하여 일본 사인의 한국진출을 용이하게 하는 한편, 궁방전과 역둔토 등 조선땅을 일본의 국유지로 편입한 것이고, 산미증식계획의 골자는 한국에서 쌀을 최대한 수탈하여 일본에 싸게 식량을 공급하여 1차대전 이후 일본의 물가를 안정시켜 일본의 수출경쟁력을 최대한 유지시키는 것이었습니다.(쌀을 최대한 싸게 공급해야 일본 노동자들의 월급을 안올려줘도 되고, 그러면 자연스럽게 일본산 생산품의 가격경쟁력은 올라가죠.) 한마디로 한국의 쌀을 최대한 쥐어짜서 일본에 넘겼기 때문에 한국에는 일제시기부터 보릿고개가 다시 살아났다죠. 30년대 조선에서 생산되는 전체 쌀 생산량에서 무려 49%의 쌀이 일본으로 넘겨졌습니다. 1930년에 이르면 무려 조선농민 전체의 48%가 보릿고개를 겪게 되고, 소작인들의 68%라는 비율이 보릿고개를 겪게 되었답니다. 쉽게 말해 집 걸러서 안굶은 농민찾기가 힘든거죠. 쌀이 없어서가 아니고, 먹을 쌀이 박박 긁어서 일본으로 넘겨졌기 때문입니다. 

이 산미증식계획을 달성하기 위한 방편이 크게 두가지인데 하나는 관계시설 확충과 토지확대, 하나는 농사개량 및 농업의 단일화입니다. 토지확대는 논의 절대면적을 늘이는 한편 이전에 밭이었던 지역도 최대한 논으로 변화시켜버린 것입니다.(이를 감당하기 위해 관계시설 증가) 농업 단일화는, 쉽게말해 그전에는 여러가지 작물이 조선에 재배되었는데, 일본에 공급을 위해 모든 농민들이 논농사가 가능한 땅에는 무조건 벼만 심도록 강제한 것입니다. 그리되자 먼저 조선농업의 자생력이 무너집니다. 내수시장만으로 농업이 돌아가지 못하게 된거죠. 그러므로 무조건 쌀은 일본에 수출해야만 하는, 농업구조 자체가 완벽하게 일본에 예속화됩니다. 그리고 여기서 식민시대의 소위 만석꾼은, 조선시대의 만석꾼과는 달리 소작인에 대한 고리대로 돈을 긁어모으는게 아니고, 일본에 쌀을 수출하여 돈을 벌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토지에 소작인이 생산한 쌀을 일종의 '상품'으로 일본에 수출하게 된 것입니다. 리스크가 없는 완벽한 돈벌이였죠. 무조건 일본은 쌀을 구매해줬으니까요. 이 정책은 조선인 내수시장에 돌아다녀야 할 쌀을 일본 노동자에게 싸게 공급한 것입니다. 한마디로 여기에 협조해서 자신의 쌀을 수출하는 것만으로도, 본인이 하는 행위의 의미를 자각하지 못하는 지주계급일지라도 이미 (적극) 친일행위에 동참한거나 마찬가지입니다. 고리대를 하는 것보다 일본에 수출하는 것이 훨씬 돈은 더 버는 길이었지요. 

여기서 문제가 된 것은 이렇게 되자 조선 지주계급과 일본 경제의 이해관계가 완전 일치하게 되어버린 것입니다. 즉 일본에 쌀을 잘 문제없이 수출하는 것은 일제의 경제적 안정에 부합하는데, 이것은 조선의 부자의 이익에도 일치하는 것으로 변화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부터 조선총독부와 조선인 지주계급의 정치적 유대가 자연스럽게 강화되고, 이게 지속되면서 조선 지주계급의 매판화, 친일화가 가속화되었다는 거죠. 

정리하자면, 식민시대에는 부자라는 것은 요즘의 상공업부자보다는 토지 지주 모델이 압도적으로 많았는데, 당시에 부자계급을 유지한다는 것은 점점 일본의 이익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게 대다수였고, 식민지배방식과 지주소작관계는 완벽하게 결합되어버렸던 겁니다. 아울러 본격적으로 일본이 30년대 이후 전쟁을 벌이게 되면, 일본의 전쟁수행능력과 물자 공급을 위해 조선의 부자들은 생산활동을 더 열심히 벌이게되죠. 기초적 공업부터 농업에 이르기까지. 그러므로 부자는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일본을 지원하는데 일조하고 조선인에게는 피해를 주는 친일행위를 한 거나 마찬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단순한 일반 조선 농민이 저항하지 못한 소극적 친일행위와는 달리 봐야한다는 겁니다. 한편 원래는 거대 지주였으나 독립운동을 지원해줬거나 본인이 직접 독립운동에 나섰거나 하는 바람에 몰락한 지주도 있습니다. 20년대까지는 일제에 대한 저항의식을 가진 부자계급도 상당히 존재했으나, 30년대에 들어가면 그런 사람들은 여러가지 사건(가령 신간회 해산)을 통해 거의 재판을 통해 사라지고 몰락하고 재산은 총독부에 흡수됩니다. 물론 이런 경향은 일본의 아주 교묘한 식민정책의 책임이 큽니다. 일본이 자연스럽게 조선 부자들을 다양한 방면에서 친일화로 유도한 면이 크지요. 33인의 민족대표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회유해서 친일파로 변질시켜버렸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지주 계급들에 대해서 비판하는게 부당하다고 할 수만은 없을 겁니다. 이들의 행위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조선 수탈을 가속화하는데 일조했습니다. 

김순흥 역시 대지주 중의 하나였죠. 그리고 자세한 역사적인 자료나 논문을 링크하신 것이 아닌, 위키피디아에 근거한 저 몇줄의 연표라면, 그것만으로 김순흥씨가 적극 친일행위를 하지 않았다는 주장의 근거가 되기엔 빈약합니다. 적극 친일행위를 하였다! 고 주장할 근거도 못되지만 말입니다. 그외의 행적이 어떤지까지 밝혀져야 더 자세히 알수 있죠. 그렇다면, 왜 김순흥은 친일파 명단으로 거론되었을까란 부분에서 위키피디아에서는 누락된 합당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도 불가능한 추측은 아니지요. 일제시기에 조선인이 몇명이었는데, 그중 딱 263명만 추려낸 것인데, 그 명단 안에 든 사람을 과연 소극적 친일행위자를 넣었겠습니까? 반드시 처벌해야만 하는 그런 합당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명단에서는 다만 1만원이상 헌액자라고 나오지만 말이지요. 이유가 단지 그거 하나라는 것으로 263인에 들어간 것일까? 저는 그런 생각이 듭니다. 

위키피디아에 기록된 행적만으로는 김순흥이 적극친일행위자 였는지 아니었는지 판단하기 힘듭니다. 오히려 제가 말씀드린 당시의 지주계급과 일본경제와의 밀착경향의 심화, 김순흥이 친일파 명단에 있었던 것을 근거하면 적극적 친일행위자였으리라 추측할만한 개연성이 더 크다고 생각합니다. '이완용 급'은 아닐지라도 말입니다.




http://www.pgr21.com/pb/pb.php?id=freedom&no=53190&page=4



** 이지아가 그렇게 부자집안의 자손이었네,, 몰랐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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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공릉역가즈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