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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7. 19.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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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 당시 강영훈 육사교장은 지지 요청을 거부했다고 하고,,서울대 문리대 rotc 교관이었던 대위 전두환은 그 반대로 행동하여,,
그의 인생에 있어서,, 크나 큰 전기를 마련합니다,,
쿠테타 세력에 적극 동조하였으니,, 그 세력하에서 잘 나갔을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
아래는 관련기사의 추천수 많은 , 의미있는 댓글 중 3개 ,,
"내가 4학년 재학 중에 5.16 군사 쿠데타가 일어났다.
초기에는 미국 측의 강력한 반대로 인하여 그 성공이 매우 불안했다. 다급해진 주동 세력들은 생도들의 지지를 통해 국면을 전환하기 위해 소위 혁명군을 육사에 급히 보냈다.
생도 대장을 역임하면서 박학다식하고 강직하고 청렴결백하기로 많은 일화를 남겼던 박창암 대령이 가슴에 수류탄을 주렁주렁 달고 눈을 번득이며 나타나 카랑카랑한 그 특유의 목소리로 동참할 것을 열심히 호소했다. 그만큼 당시 4년제 육사에 대한 미국 측의 관심과 국민적 기대와 신뢰는 대단했었다.
그때 나는 제1대대장 생도 직을 맡고 있었다. 참으로 난감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언젠가는 우리가 주동이 되어 진정한 자기희생의 혁명을 반드시 이루리라고 마음 속 깊은 곳에 숨겨놓고 가슴을 펴며 살아왔는데, 그들이 과연 어떤 생각을 가진 입장의 사람들인지도 모르겠고 흡사 아끼고 아껴놓은 귀한 기회를 도둑 맞은 것 같은 착잡한 심정이었다.
지지할 것인가, 반대할 것인가를 두고 의견이 분분하였었다. 우리는 기왕 지휘체제가 와해되어버린 혁명 상황이니까 북극성 동창회(육사 동창회)의 결정에 따르기로 했다. 그러나 끈질긴 회유와 협박에 밀려 현역 훈육관들은 점차 지지 쪽으로 돌아섰다. 훈육관들이 소리를 지르며 집합을 명령했지만 우리 간부 생도들은 이에 응하지 않고 피해 버렸다.
엎치락뒤치락 실랑이 끝에 해가 서산으로 넘어갈 즈음 생도들은 단독 군장으로 식당 앞에 집합하였다. 생도대장 김익권 장군의 일장 연설이 끝난 다음 우리 생도들은 모두 가지고 있던 M-1소총을 회수 당하였다. 군인에게 있어 가장 큰 불명예인 무장해제 상태가 된 것이다. 그 날 저녁 중대장 생도 이상 우리 자치 간부 생도들은 명령 불복종의 이유로 불쾌한 냄새가 가득한 임시 유치장에 모두 감금되었다. 나는 그 유치장에서 제1중대장 생도 최창윤(총무처 장관 역임, 작고)생도와 퇴교 이후의 앞날에 대해서 이야기도 하며 하룻밤을 보냈다. 다음날 아침 일찍 밖에서 요란하요란하게 떠드는 소리가 나더니 무슨 큰 은전이라도 베풀어 준 듯, 특별 석방되었다며 내보내 주었다.
기분은 매우 언짢았지만 우리는 5.16을 지지한다는 시가 행진을 했고 시청 앞에서 지지 선언문을 낭독했다. 이렇게 해서 육군사관학교는 우리나라 민주 발전사에 그리고 국군 발전사에 가장 치욕적인 기록으로 남을 5.16을 성공하게 만드는데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것도 사실상 협박에 굴복하여 하는 수없이 나섰던 것이다. 강한 자 앞에는 무조건 손들고 항복함이 일신상의 안일을 위해 상책이라는 기회주의적인 사고를 생도 시절부터 우리는 이미 체득한 셈이다. 그 결과가 광주민중항쟁 과정에서의 무자비한 학살 등 우리 역사에 없었어야 할 부끄러운 흔적들을 남겼다고 할 수 있다.
육사 생도들만 이런 것은 아니었다. 다른 장군들도 거의 마찬가지였다. 12.12 군사반란 때, 천하를 주름 잡으며 떵떵거리던 기라성들도 베레모를 쓴 공수단 하사관들이 들이닥쳐 총을 겨누면 거의가 목숨을 애원하듯 두 손을 버쩍 들고 항복했다. 한 사람도 목숨 걸고 대항하지 않았다. 불행히도 우리 군을 주도해온 지도 세력들은 거의가 역사의 중요한 고비마다 정의의 편보다는 강자(强者) 쪽에 줄 선 사람들이다.
-정운현님~표명렬장군님의 "개혁이 혁명보다 어렵다'라는 책 일부 내용입니다
초기에는 미국 측의 강력한 반대로 인하여 그 성공이 매우 불안했다. 다급해진 주동 세력들은 생도들의 지지를 통해 국면을 전환하기 위해 소위 혁명군을 육사에 급히 보냈다.
생도 대장을 역임하면서 박학다식하고 강직하고 청렴결백하기로 많은 일화를 남겼던 박창암 대령이 가슴에 수류탄을 주렁주렁 달고 눈을 번득이며 나타나 카랑카랑한 그 특유의 목소리로 동참할 것을 열심히 호소했다. 그만큼 당시 4년제 육사에 대한 미국 측의 관심과 국민적 기대와 신뢰는 대단했었다.
그때 나는 제1대대장 생도 직을 맡고 있었다. 참으로 난감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언젠가는 우리가 주동이 되어 진정한 자기희생의 혁명을 반드시 이루리라고 마음 속 깊은 곳에 숨겨놓고 가슴을 펴며 살아왔는데, 그들이 과연 어떤 생각을 가진 입장의 사람들인지도 모르겠고 흡사 아끼고 아껴놓은 귀한 기회를 도둑 맞은 것 같은 착잡한 심정이었다.
지지할 것인가, 반대할 것인가를 두고 의견이 분분하였었다. 우리는 기왕 지휘체제가 와해되어버린 혁명 상황이니까 북극성 동창회(육사 동창회)의 결정에 따르기로 했다. 그러나 끈질긴 회유와 협박에 밀려 현역 훈육관들은 점차 지지 쪽으로 돌아섰다. 훈육관들이 소리를 지르며 집합을 명령했지만 우리 간부 생도들은 이에 응하지 않고 피해 버렸다.
엎치락뒤치락 실랑이 끝에 해가 서산으로 넘어갈 즈음 생도들은 단독 군장으로 식당 앞에 집합하였다. 생도대장 김익권 장군의 일장 연설이 끝난 다음 우리 생도들은 모두 가지고 있던 M-1소총을 회수 당하였다. 군인에게 있어 가장 큰 불명예인 무장해제 상태가 된 것이다. 그 날 저녁 중대장 생도 이상 우리 자치 간부 생도들은 명령 불복종의 이유로 불쾌한 냄새가 가득한 임시 유치장에 모두 감금되었다. 나는 그 유치장에서 제1중대장 생도 최창윤(총무처 장관 역임, 작고)생도와 퇴교 이후의 앞날에 대해서 이야기도 하며 하룻밤을 보냈다. 다음날 아침 일찍 밖에서 요란하요란하게 떠드는 소리가 나더니 무슨 큰 은전이라도 베풀어 준 듯, 특별 석방되었다며 내보내 주었다.
기분은 매우 언짢았지만 우리는 5.16을 지지한다는 시가 행진을 했고 시청 앞에서 지지 선언문을 낭독했다. 이렇게 해서 육군사관학교는 우리나라 민주 발전사에 그리고 국군 발전사에 가장 치욕적인 기록으로 남을 5.16을 성공하게 만드는데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것도 사실상 협박에 굴복하여 하는 수없이 나섰던 것이다. 강한 자 앞에는 무조건 손들고 항복함이 일신상의 안일을 위해 상책이라는 기회주의적인 사고를 생도 시절부터 우리는 이미 체득한 셈이다. 그 결과가 광주민중항쟁 과정에서의 무자비한 학살 등 우리 역사에 없었어야 할 부끄러운 흔적들을 남겼다고 할 수 있다.
육사 생도들만 이런 것은 아니었다. 다른 장군들도 거의 마찬가지였다. 12.12 군사반란 때, 천하를 주름 잡으며 떵떵거리던 기라성들도 베레모를 쓴 공수단 하사관들이 들이닥쳐 총을 겨누면 거의가 목숨을 애원하듯 두 손을 버쩍 들고 항복했다. 한 사람도 목숨 걸고 대항하지 않았다. 불행히도 우리 군을 주도해온 지도 세력들은 거의가 역사의 중요한 고비마다 정의의 편보다는 강자(强者) 쪽에 줄 선 사람들이다.
-정운현님~표명렬장군님의 "개혁이 혁명보다 어렵다'라는 책 일부 내용입니다
이종찬은 자신을 친일을 많이 뉘우친것으로 알고 있지만 그가 한 친일은 역사의 심판을 받아야 함이 마땅하고 다만 자신의 총장재직시 정치적 중립을 위해서 노력한것은 좋아보입니다만...그도 결국은 박정희의 개가 되고 말았네요
이런 이종찬을 참군인으로 묘사한것은 너무 자나침이 보입니다...
특히 정운현님 같은 친일역사를 비판하시는분이...
참 그당시 육사생도 대표가 나중에 하나회 핵심멤버가 되었다는 글을 읽은적이 있는데...보안사령관을 지낸 최모시기라고...
우선 의견 잘 보았습니다.
님이 쓰신대로 이종찬은 3대가 대를 이어 일본군에 충성한 집안입니다.
그런 사실을 저도 알고 있고, 이미 글에서 쓴 바도 있습니다.
특히 이종찬이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에 묻힌 사실도 지적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이종찬을 '참장군'이라고 한 것은 그의 친일전력과는 별개로 판단한 것입니다.
님도 쓰신대로 이종찬은 이승만의 부당한 군대동원에 반대한 사람입니다.
그 점을 저도 높이 산 것이며, '참장군'이라는 표현은 제가 지어낸 것이 아니라
<동아일보> 논설위원을 지낸 분이 쓴 <참장군 이종찬>이라는 책의 서명에서 딴 것입니다.
중언하자면, 이종찬의 친일경력이 '과'라고 한다면
이승만의 부당한 명령을 거부한 것은 '공'이라고 생각합니다.
흔히 역사인물을 평가할 때 '공과'를 구분해서 평가해야 한다고 하는데 이 말에 저는 동의합니다.
그래서 박정희에 대해서도 저는 나름으로는 '공과'를 구분해서 평가하는 편입니다.
이종찬도 그런 맥락에서 이리 한 것이지 그의 친일전력까지 덮자는 것은 아닙니다.
님이 쓰신대로 이종찬은 3대가 대를 이어 일본군에 충성한 집안입니다.
그런 사실을 저도 알고 있고, 이미 글에서 쓴 바도 있습니다.
특히 이종찬이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에 묻힌 사실도 지적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이종찬을 '참장군'이라고 한 것은 그의 친일전력과는 별개로 판단한 것입니다.
님도 쓰신대로 이종찬은 이승만의 부당한 군대동원에 반대한 사람입니다.
그 점을 저도 높이 산 것이며, '참장군'이라는 표현은 제가 지어낸 것이 아니라
<동아일보> 논설위원을 지낸 분이 쓴 <참장군 이종찬>이라는 책의 서명에서 딴 것입니다.
중언하자면, 이종찬의 친일경력이 '과'라고 한다면
이승만의 부당한 명령을 거부한 것은 '공'이라고 생각합니다.
흔히 역사인물을 평가할 때 '공과'를 구분해서 평가해야 한다고 하는데 이 말에 저는 동의합니다.
그래서 박정희에 대해서도 저는 나름으로는 '공과'를 구분해서 평가하는 편입니다.
이종찬도 그런 맥락에서 이리 한 것이지 그의 친일전력까지 덮자는 것은 아닙니다.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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