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2010. 10. 17. 12:16
제갈량의 정치적, 경제적 능력은 연의에서도 잘 나와있습니다.

강하에 자리잡고서 오나라를 회유하여 적벽대전을 일으킨점.

적벽대전 이후 조조와 손권의 눈치를보며 형주를 먹은점.

남만을 정벌하여 복속시킨점.

등등...

연의에서도 정치적 능력이 묘사된 곳이 상당히 많습니다.

그리고 경제적 능력...

목우-유마를 개발하여 병량수송을 쉽게 하였으며,

위나라의 1개주(州) 수준의 나라를 북벌이 가능할 정도로 국력의 수준을 끌어올렸고,

제갈량 사후에도 나라가 잘 돌아갈 수 있도록 국가의 기반을 다져놨었지요.

단지, 소설속 각색된 인물이다보니 전투에 대한 이미지가 부각되었을 뿐. 소설 내에서도 제갈량의 천재적인 내정능력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깔 거리가 있나 한참동안 고민해보다가 하나 써 봅니다.

제갈량의 얼마 안 되는 단점 중 하나는, 그가 너무 뛰어난 재능을 지녔는데다 책임감 또한 강했다는 사실 자체가 아닌가 싶습니다. 삼국지 후반을 보면 제갈량은 전장에서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밥도 제대로 못 먹으면서 사소한 일 하나하나를 다 자신이 챙겼다고 하지요. 전장에서 부하를 장 몇십대 때려서 처벌할 일까지.

그런데 생각해 보면, 야전총사령관이 '저놈 보초 서다 졸았으니 곤장 삼십 대 때려라' 까지 일일이 지시하고 결재한다는 건 말이 안 되는 겁니다. 그러면 안 되는 거예요. 큰 틀에서 대국적인 부분만 관찰하고 제어하기에도 힘들 터인데, 그런 사소한 것들까지 일일이 체크했다는 건 말이지요. 이건 요즘으로 치면, 국장님 결재 올렸는데 국장님이 한참동안 보고서 들여다보더니 맞춤법 수정해 주고 줄간격 고치는 거나 진배없습니다. 아랫사람으로서는 멍한 거지요.

이는 아마도 부하들에게 일을 맡기기에는 그들의 능력이 자신을 따라오지 못한다는 걸 제갈량 자신이 너무나도 잘 알고 있고, 그러기에 그 누구보다도 일을 잘하는 자신이 그런 것들까지 모두 처리해야 한다는 책임감 때문에 발생한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하지만 리더는 자신의 권한을 부하들에게 나눠줄 필요가 있습니다. 아무리 무력 50 지력 50 정치50 매력 50의 쩌리들이라도, 설령 그 부하가 무력19 지력 15 매력 13의 삼국지2 조표급이라 할지라도, 부하들에게 좀 더 많은 권한을 위임했어야 합니다. 그렇게 했어야만 촉나라 전체를 양 어깨에 걸머진 지도자로서(응? 유선은?) 보다 큰 일에만 집중할 수 있었을 겁니다. 몸을 돌보아 가면서 말이지요.

물론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인재와 자원이 간당간당한 촉나라라는 한계 자체에 있었을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갈량은 리더로서 '상대적으로 사소한 일'에는 좀 더 무관심해야만 했다고 생각합니다. 선주와 촉나라에 대한 책임감으로 똘똘 뭉쳐진 그의 성격상 그게 힘들었겠지만요.

하지만 결론은 제갈량=신.














뭐 저 같아도...

'이놈은 내 후계자야!' 라고 믿었던 녀석에게 중요한 일을 시켰더니
자기 잘난 줄만 알아서 시키는 대로 안 하고 제멋대로 나대다가 일을 쫄딱 말아먹고 엉엉 울면서 돌아오고

'이놈은 이 나라에서 나 다음으로 유능해!'하고 믿었던 녀석에게 중요한 일을 시켰더니
일 잘하고 있다는 보고서는 올라오는데 알고 보니 죄다 뻥이었고 사실 일은 하나도 안 해 놓은 데다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해서 일을 말아먹고는 거기다 반성은커녕 뒤에서 사람들에게 내 욕을 하고 다니더라...

라고 하면 저렇게 될 것 같긴 하네요. 후훗.

이엄 모가지를 날리지 않은 것만 해도 대인배.(물론 이엄의 세력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긴 하겠지만요.)











신 진수 등이 말씀 올립니다. 신이 이전에 저작랑(著作郎)으로 있을 때 시중(侍中) 영중서감(領中書監) 제북후(濟北侯) 신 순욱(荀勖), 중서령(中書令) 관내후(關內侯) 신 화교(和嶠)가 상주하여, 신으로 하여금 예전 촉 승상 제갈량의 옛일을 정리하도록 했습니다. 제갈량은 위태로운 나라를 보좌하고 험조한 곳에 의지해 복종하지 않았으나, 오히려 그의 말을 기록하고 부끄럽고 착한 말을 남겨두니, 이는 실로 대진(大晉)의 광명 지덕함이 무궁하게 끼친 것으로 자고이래로 일찍이 없었던 일입니다. 중복된 것은 삭제하고 서로 유사한 것끼리 분류해 모두 24편으로 만들었고 편명은 앞에 적은 대로입니다.

제갈량은 어려서 출중한 재주와 영패(英霸)의 기량을 갖추고, 키가 8척에 용모가 매우 훌륭하니 당시 사람들이 그를 남다르게 여겼습니다. 한나라 말 혼란을 만나 숙부 제갈현을 따라 형주로 피난가서, 몸소 밭갈며 문달(聞達)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이때 좌장군 유비가 제갈량이 뛰어난 기량을 갖추었다 하여 제갈량의 초려를 세 번 방문하니, 제갈량은 유비의 웅자(雄姿-웅대한 자태)가 걸출함을 보고 마침내 해대사성(解帶寫誠-출사하여 성심을 다함)하고 서로 두텁게 결납(結納-결탁)했습니다.

위무제(魏武帝-조조)가 남쪽으로 형주를 정벌하고 유종이 주(州)를 들어 투항하자, 유비는 세력을 잃고 군사는 적었으며 송곳 꽂을 땅조차 없었습니다. 제갈량은 그때 나이 27세로 기책(奇策-기묘한 계책)을 세우니, 직접 손권에게 사자로 가서 오회(吳會)에 구원을 청했습니다. 손권은 이전부터 유비를 복앙(服仰-탄복하고 우러름)한데다가, 또한 제갈량의 기아(奇雅-뛰어나고 고아함)함을 보고 그를 매우 경중(敬重-공경하고 중히 여김)하여, 곧 군사 3만을 보내 유비를 도왔습니다. 이에 유비가 힘을 얻어 무제와 교전해 그 군을 대파하고, 승세를 타 크게 이겨 강남을 모두 평정했습니다. 그 뒤 유비는 또한 서쪽으로 가서 익주를 취하고 익주가 평정된 뒤 제갈량을 군사장군(軍師將軍)으로 삼았으며, 유비가 존호를 칭하자 제갈량을 승상, 녹상서사로 삼았습니다.

유비가 죽은 뒤 그 사자(嗣子-대를 이은 아들, 즉 유선)가 유약(幼弱)하여, 크고 작은 일은 모두 제갈량이 전담했습니다. 이에 밖으로는 동오와 연결하고 안으로는 남월을 평정하고, 법을 세우고 제도를 시행하며 융려(戎旅-군대,군무)를 정리하고, 기계에 능하고 교묘한 재주가 있어 이를 극도로 연구하고, 과교(科敎-법과 교령)을 엄명히 해 상벌에 필히 믿음이 있게 하여 악은 필히 처벌되고 선은 필히 현창되니, 관원에게는 간사함이 용납되지 않고 사람들은 스스로 힘쓰며 길에 떨어진 물건이 있어도 줍지 않고, 강자가 약자를 침범하지 않고 사회기풍이 숙연해졌습니다.

당시 제갈량의 본 뜻은, 나아가서는 용양호시(龍驤虎視-용이 머리를 들고 범이 노려봄)해 사해(四海)를 포괄하고, 물러나서는 변경에 걸터앉아 우내(宇內-천하)를 진탕(震蕩-뒤흔듬)하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자신이 죽은 후에는 능히 중원을 짓밟고 상국(上國-위나라)에 맞설 자가 없다고 여겼기에 이 때문에 용병을 그치지 않고 여러 번 무력을 과시했습니다. 그러나, 제갈량의 재주는 치융(治戎-군사를 다스림.군 통수)에는 능하나 기모(奇謀-기이한 모략)는 부족하고, 백성들을 다스리는 재간(理民之幹)이 장략(將略-장수로서의 지략)보다 더 뛰어났습니다. 그런데 그와 대적한 이 중에는 혹 인걸(人傑)도 있었고 또한 군사 수가 부족해 적과 같지 못했으며 공격과 수비는 서로 다르므로, 이 때문에 여러해 동안 군사를 움직였으나 능히 이기지 못했습니다.

옛날 소하(蕭何)는 한신(韓信)을 추천하고 관중(管仲)은 왕자(王子) 성보(城父)를 천거했는데, 이는 모두 자신의 장점을 헤아려볼 때 모든 것을 겸하여 가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제갈량의 기량은 정리(政理-정치)에 능하니 또한 관중, 소하의 아필(亞匹-버금가는 짝, 동류)이라 할 만합니다. 그러나 당시 명장 중에 성보, 한신 같은 이가 없어 이 때문에 공업이 지체되고 대의를 이룰 수 없었던 것입니다. 대저 천명이 돌아가는 곳은 정해져 있어 (사람의) 지력(智力)으로 다툴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청룡 2년(234년) 봄, 제갈량은 군을 이끌고 무공(武功)으로 나와 군사를 나눠 둔전하고 오래도록 주둔할 기초를 만들었다가 그해 가을 병으로 죽으니, 일반 백성들이 그를 기리어 그 말이 입에 가득했습니다. 지금까지도 양주(梁州), 익주(益州)의 백성들은 제갈량을 찬탄하여 그 말이 아직도 귀에 남아 있으니, 비록 감당(甘棠-시경 감당편)에서 소공(召公)을 읊고, 정나라 사람들이 자산(子産-정나라 정치가)을 노래했다고 하나 먼 과거의 비유를 들 필요가 없습니다. 맹가(孟軻-맹자)가 말하길, “편안히 하는 도리로 사람을 부리면 비록 수고스러워도 원망하지 않고, 살리는 도리로 사람을 죽이면 비록 죽더라도 원망하지 않는다.”고 했으니 실로 옳은 말입니다.

의논하는 자들이 혹 의심하기를, 제갈량의 문채(文彩-문장,문사)가 아름답지 않고 정녕주지(丁寧周至-여러 번 반복하며 꼼꼼함)함이 지나치다고 합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고요(咎繇-순임금때 명신)는 대현(大賢)이고 주공(周公)은 성인(聖人)인데, 상서(尙書-서경)를 살펴보면 고요의 계책은 간결하고 우아하나 주공의 가르침은 번잡하고 상세합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고요는 순(舜), 우(禹)와 함께 말했고 주공은 신하들과 맹세했기 때문입니다. 제갈량과 더불어 말한 이들은 모두 뭇 평범한 이들이라 이 때문에 그 문장의 뜻이 심오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 가르침과 남긴 말은 모두 경사종물(經事綜物)하여 공정하고 성실한 마음이 그의 문묵(文墨-문장)에 드러나 족히 그 의리(意理-뜻과 이치)를 알 만하며 지금에도 유익한 점이 있습니다.

엎드려 생각건대, 폐하께서는 옛 성인을 힘써 본받으시고 호탕하여 꺼리는 바가 없으시니, 이 때문에 비록 적국(敵國)의 비방하는 말일지라도 모두 싣게 하고 고치거나 숨기는 바가 없어 이로써 대통(大通)의 도를 밝히셨습니다. 삼가 베껴 적어 저작국에 올렸습니다. 신 진수는 실로 두렵고도 두려워, 머리를 조아리고 또 조아립니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태시(泰始) 10년(274년), 2월 1일 계사일, 평양후 상(平陽侯相) 신 진수(陳壽)가 올립니다.

--------------------------------------------------------------------------------------------------------------

진수가 제갈량 이 사람이 깔 게 없습니다..한 건 아니고..
적국의 신하지만 황제(사마염)께서 대통한 명군이시니 이 자라면 본받을만한 인물입니다...
하며 진수가 삼국지를 편찬하기 전에 '제갈량집'이라고 하여 먼저 만들어 사마염에게 바쳤을 때 올린 글입니다.

기략이 부족한듯 하다... 라며 제갈량의 군략을 낮게 평가하는 듯 하다가도
'그와 대적한 이 중에는 혹 인걸(人傑)도 있었고 또한 군사 수가 부족해 적과 같지 못했으며 공격과 수비는 서로 다르므로...' 라며
은근히 옹호해주고 감히 관중과 소하라는 영걸에 비교하면서 '한신같은 인물만 있었어도 대업을 이루었을 거다.'
라며 옹호해줍니다.
(제갈량이 대적했던 인물이 사마의였고 그의 손자는 현재 황제이니 함부로 그의 군재를 치겨 올리는 건 정말 목숨을 거는 것임에도 말입니다.)

진수는.. 삼국지를 만들기도 전에 '제갈량집'을 먼저 만들어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하며, 제갈량 만세를 외쳤던 인물인 것이지요-_-;

















왜 쓰신 건진 모르지만 다 맞는 말입니다.

다만, 가정 패배의 50%이상은 마속의 상관인 제갈량에게 있는 겁니다.

쓸 사람이 마속밖에 없었단 건, 당시 기록을 볼 때 다른 문무 백관들이 가정에 위연이나, 오의를 추천했는데 일방적으로 마속에게 맡기기로 결정했다는 말이 나오기에 옳지 않은 말입니다.

물론, 인재 없는 촉에서 마속을 차세대로 키워 보겠다는 노림수였다면 이해는 되나, 가정 전투 전이나 후나 항상 신중하고 안전한 수(위와 달리 촉은 늘 전력이었죠.)를 두었던(둘 수 밖에 없었던) 제갈량이었던 걸 생각하면, 그 중요한 순간에 왜 모험을 했느냐는 정말 제갈량답지 못한 행동이라고 밖에 볼 수 없습니다. 기록에 나와 있는대로, 제갈량이 마속과의 개인적 친분 때문에 중용하였다는 말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이죠.

그럼에도 제갈량은 관우, 그리고 조조와 더불어 당연히 삼국지 내에서 최고임에는 분명합니다. 남아있는 기록들이란 것이 승자의 기록이란 걸 생각하면, 실제로는 더욱 대단했겠죠.

그리고 개인적으로 능력에 비해서 과소평가(라기 보다는 인지도가 떨어지는)받는 인물로 저는 순욱이라 꼽고 싶네요.

극단적인 가정이지만, 만약 순욱이 제갈량의 위치에 있었어도 역사는 그닥 다르지 않았을 것이고, 지금의 제갈량의 자리에 순욱이 있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연의 때 너무나 사기적인 스펙 때문에 오히려 반감을 가지게 했지만 정사를 통해 오히려 옹호하게 된 캐릭터입니다.

유비가 형주에 있을 때부터 알게 모르게 엄청난 활약을 했지만 (형주에서 호족들과의 관계개선, 조조에게 대항하도록 오나라를 설득, 유비 입촉 후에 그의 정치적 활약 등) 방통, 법정에게 늘 밀리다가 유비가 죽은 후에야 사실상 1인자가 되었습니다. 사실 인간적으로 그 정도면 유비에게 어느 정도 불만을 가질 법도 한데, 오히려 인재난 속에서 유비의 뜻을 이루기 위해 온갖 고난을 다 겪고 홀로 모든 짐을 지다가 죽고말죠. 또한 연의에서는 주유와의 머리싸움과 사마의와의 북벌전에서 신선같은 활약을 보여주지만 실제로 제갈량의 참다운 능력은 성실함과 유비와 촉을 위한 충성심이죠. 그의 출사표와 유언은 아직도 심금을 울릴만한 명필입니다. 북벌 당시 유일하게 촉의 원년멤버였던 조운의 병사와 더불어서 2기 멤버라고 할 수 있는 관흥의 요절, 마속의 실책까지 정말 불운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제갈량에게 아쉬운 점이 있다면, 스스로 너무 많은 짐을 지려고 했다는 부분입니다. 물론 촉나라가 인재난에 허덕인건 사실이지만 승상으로서 사소한 일들까지 스스로 처리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혔다는 생각도 듭니다. 또한 위연과 화목하지 못했던 점과 가정에서의 마속의 패배도 상장군인 제갈량에게 어느 정도 책임이 있다고 보구요. 이 부분에서는 조조의 용병술에 새삼 감탄하게 되죠. 철저한 능력위주의 인재선발. 물론 순욱의 역할이 엄청나긴 했습니다만, 한 나라의 최고위치에 선 자로서 제갈량에게 이러한 용병술이 갖추어졌더라면 인재난을 완전히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강유는 정치적 능력보다는 북벌 이후의 자신을 잇기 위함이었고, 제갈량의 뒤를 이은 장완이나 비의는 제갈량만큼의 능력을 발휘하지 못했죠.

어쨌거나, 아... 제갈량 그는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강유와 비교해 제갈량이 정말 대단한 점은 국가적 규모의 군사작전을 지속하면서도 촉 경제를 비교적 성공적으로 이끌었다는 점이죠.
'내정'이라고 짧게 표현되는 제갈량의 위대한 치적중에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건 당시 기준으로 생산력이 타 국에 비해
까마득히 부족한 촉한을 이끌며 대위항쟁노선을 유지했다는 점이라고 생각해요.
'댓글 중에 강유가 장완 등의 제어를 받고 실질적인 권한이 제갈량만 못했기 때문에 한계가 있었다' 라는 내용도 있는데
제가 봤던 다른 기록에는 오히려 강유가 제갈량 사후 독자적인 군사작전을 시도하면서 실제 촉 경제가 파탄지경에 이르렀다는
해석이 있더라고요. 그런 의미에서 연의의 간신대명사 황호도 사실 혼자 나라를 말아먹었다는 해석보다는
경제가 붕괴된 상태의 촉 내정의 모습에 대한 대표적인 상징 정도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네요.
경제와 국방의 밸런스가 얼마나 어려운가는... 이라크전 수행하며 상승한 미국의 부채규모, 혹은 더 가까운 뽀글공화국을
보면 알 수 있죠.. (지금처럼 자본생산력보다 노동생산 비중이 훨씬 높았던 옛날엔 더욱 어려웠을 듯)
역시 결론은 제갈량은 신이군요.













촉한 후기의 내정 약화가 강유 책임이라... 강유는 보급까지 최대한 자급자족해가며 군을 운용했습니다만.
비의 사후의 강유는 군부의 바지사장 이상은 아닙니다. 성도 인근의 중앙군은 물론이고 한중군도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실권이 없는 상태였죠. 물론 움직일수 있는 군 규모는 1만에서 수만까지 늘긴 늘었습니다. 그러나 강유의 권한은 딱 거기까지입니다.
황호와 진지, 그리고 그 뒤에 버티고 있는 유선(장완 사후 유선은 직접 정사를 돌보았습니다. 저 비의도 사면령 하나 마음대로 내리지 못할 정도로 내정에서의 권한이 제약된 상태였습니다. 비의 사후엔 더하죠.)의 권한과 책임은 강유의 몇배에 달합니다. 강유는 내정에 관한 권한은 전혀 없고 군부에 대한 영향력도 상당히 미약한 수준인데 강유에 의해 촉의 경제가 파탄 수준이 이르렀다는 건 강유에게 너무 지나친 책임을 지우는 것입니다.

뭐, 사실 촉한의 경제가 후기에 약화된 것은 사실이나 전혀 파탄 수준이 아니었다는 것은 항복시 남은 물자(1년 세수입의 절반 정도가 창고에 보존되어 있었음)나 등애의 건의 등(물자가 풍부하니 파촉의 물자로 동오 원정군을 꾸리자는 건의를 했음)을 보면 명확합니다만.













정사 기준으로만 설명드리면, 위나라나 진나라의 건국에 있어서 결코 어드밴티지를 받을 수 없었던 인물임에도 불구하고,(실제로 나중에 사후 공신 관직 받을 때 순욱은 엄청나게 홀대받습니다.) 참모들 중 가장 상석의 자리에서 기록되어 있습니다.

벼슬(한나라 기준)로도 다른 참모들에 비할 바가 아니었고요.

내정이야 더 말할 필요가 없이 독보적으로 뛰어나고요.(요새 삼국지 시리즈에서 정치력 1등은 항상 순욱이죠. 최근의 코에이의 능력치 트렌드가 촉나라는 소수의 S급들로 싸우고 위나라는 다수의 A급들로 싸우는 걸로 밸런스를 맞춰가는 걸 생각하면, 문관풀이 넘쳐나는 위나라 소속으로 정치력 1등을 받은 건 정말 대단한 겁니다.)

이리만 보면 순욱은 "소하"의 역할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조조는 순욱을 "소하"가 아닌 "장량"으로 표현하였습니다.

나는니가슬프다님이 말씀한 바와 같이, 실제로 정사에 보면 조조가 큰 전투와 군략을 앞두고는 "항상" 수도에 있는 순욱에게 먼저 묻고 나서 실행에 옮겼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유비가 죽기 전까지 제갈량의 역할이 순욱의 이러한 역할과 거의 똑같았죠. 다만 둘의 차이라면, 순욱은 스스로 전쟁에 직접 나설 필요가 없었지만, 제갈량은 결국엔 스스로가 전쟁에 직접 나서야 하는 처지에 있어야 했다는 차이가 있겠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오히려 곽가가 과대평가된 인물입니다. 괴팍한 성격에 짧은 생애와 같은 극적인 요소에다가 적벽대전에서 조조의 곽가드립. 거기다 연의에서 조조가 악역으로 턴힐할 땐 이미 죽고 없었다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많은 미화가 된 인물이죠.

굳이 순욱을 제갈량에 비할 수 없다고 생각하신다면, 순욱+곽가로 가지 마시고, 순욱+순유로 가야함이 옳습니다.

반대로 순욱과 제갈량을 비교할 만하다고 보신다면, 순욱+순유=제갈량+방통 정도로 보는게 옳다고 봅니다.

조조가 연전연승할 때, 현장에서 조조와 함께 직접 뛰었고 대부분의 전투에서 승리를 안긴 계책을 짜낸 것이 순유이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어느정도 주어진 조건을 바탕으로 대국을 일으키고 더욱 강건하게 하는 능력은, 부족한 조건에서 나라를 일으키는 능력과 마찬가지로 인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전 제갈량과 순욱을 비교할 수 있는 위치에 놓고 싶습니다.
















역사속의 제갈빠들...


삼국지에 주석을 단 배송지 : 우리 제갈짱이 위나라에서 일했으면 진군과 사마의도 다 발라버렸을 거임..

북송의 대문호 소동파 : 조조가 졸라 강한데도 우리 제갈짱은 충심만으로 이에 대항했음.ㅠㅠㅠㅠ

주자학을 집대성한 바로 그 주희 : 맹자 이후엔 장량과 제갈량만 있을 뿐임. 나머진 깝nono..


삼국지의 저자 진수가 제갈량은 군의 통치엔 우수했으나 기책은 허접했다는 소리를 하니 이에 대한 제갈빠들의 반박들

부현의 부자 : 제갈량이 기책을 쓰지 않은 건 촉이 약소국이여서 그랬던 거임. 그래서 신중하게 행할 수밖에 없었음.(요즘에도 이게 거의 대세죠.;;)

왕부지의 독통감론 : 유선이 멍청하고, 위가 너무 강했기에 계획을 변경해 촉을 보존하려고 했기 때문임.

홍매의 용재수필 : 우리 갈량옵빠가 기책은 위험하니까 쫄아서 그런 게 아니거든여. 대의를 표방한 출병이니 남을 속이는 치사한 짓꺼리는 안한거거든여.(송양지인도 아니고.;;; 이쯤 되면 거의 정신승리 수준인데.;;;)


북위의 최호가 제갈량은 조씨들한테 이기지도 못했고, 단지 유장으로부터 나라를 강탈해 황제를 참칭했을 뿐이다라는 평에 대한 제갈빠의반박

왕세정의 서소자첨제갈량론후 : 유비보고 유장 먹으라고 한 건 우리 갈량 님아가 아니라 방통과 법정임. 또 유장 애비 유언은 한조로부터 독립해서 황제가 될려고 했던 호로새퀴이기 때문에 그의 아들 유장을 토벌한 건 정당한 일임.

이외에도 제갈빠들은 많았다고 합니다... (이상 펌)

----------------------------------------------

그외에도 그 유명한 진수의 평, '제갈량은 정치는 능한데 기책은 좀..'는
오히려 '우리 승상님이 기책만 되셨어도 짱먹는건데 샹...'이라는 투로 해석하는게 맞다죠.






출처



🦋🐞전용홀더 채택으로😄😅"잔동작" 없이💕🚎맺고 끊음이 분명하여 🚠🚂 순식간에 책을 펼치는데 특화된 🛴🛵"노원도킹책갈피세트"⚽️🏀
posted by 공릉역가즈아~~